문헌에 의하면 북송 말년의 개봉성에서는 ‘시정의 장사치들은 왕왕 시장 점포 이집 저집 돌아가며 음식을 사먹어야만
했고 집에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야시장은 삼경이 되어서야 끝나서 오경이 되자마자 다시 열렸으며, 번화가 같은 곳에서는 밤새도록 쉬지 않고 장사를 한다’, ‘겨울철에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야시장이 열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작은 고을이라 하더라도 주점과 찻집 등은 없어서는 안되었다. 시장의 상점은 식당을 겸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송대 사람들은 대개 하루 세끼를 먹었으며,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던 고대의 생활 방식은 송대에 이르러 완전히 바뀌었다. 음식을 만들 때 물과 기름 및 각종 양념을 사용하였으며 요리법도 삶기, 찌기, 볶기, 지지기, 튀기기, 저미기, 굽기 등 오늘날과 대체로 비슷하다. 고관대작들의 연회석은 겉치래에 상당한 신경을 써 사치, 낭비 풍조가 유행하였는데 남송의 도읍인 임안에서는 지부라 해도 최고 요리사를 고용하지 못했으니 고관들의 연회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차와 술은 송대에 가장 중요한 음료로서 사회 하층민에게도 차 마시기는 사교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음주 역시 사회 각 계층에서 성행하여 많은 고관과 귀족의 집에서는 직접 술을 빚었다. 요식업이 발달하면서 일상용
그릇의 수요가 대폭 늘었다. 소대에는 술을 담는 데 보편적으로 병이 사용되었고 차를 끓이거나 마시는 데는 각기 다른 도기와 자기가 쓰였다. 또 연회의 술자리에는 공기, 접시, 잔, 대접 등의 식기만 나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송대 도자기업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