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대는 중국의 조소 예술이 크게 발전한 시기로 용의 종류, 수량, 재질 등이 모두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서한 이후에는 진시황릉의 실물과도 같은 대형 토기 인형은 이미 그 맥이 끊겼다. 한 대 황제의 능 역시
진시황릉보다 많았지만 규모는 훨씬 작아 높이가 50~60cm에 불과하였다.
유물 발굴을 통해 서한 초기에는 두 종류의 토기 인형이 있었다. 하나는 진시황릉의 토기 인형을 그대로 따라 한 것으로 인형 몸 위에 바로 의복을 직접 빚어 넣은 후 채색하였다. 다른 하나는 진대의 토기 인형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다.
남자와 여자의 나체를 만든 후 그 위에 비단 옷을 입혔다.

사진출처-hmn.wiki
https://hmn.wiki/ko/History_of_the_Han_dynasty
일부 지위가 높은 장군이 죽은 후에도 이 같은 영광을 누렸다. 출토된 일부 왕족의 무덤에서는 무사 인형뿐 아니라
하인이나 약사 인형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그 규모는 황제의 능보다는 작다.
동한에 이르러 장원경제가 발전하면서 강력해진 지주들은 정계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에 그들의 무덤에서도 실제 전원생활이나 생활의 모습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축소된 토기 인형들이 출현하였으며,
그 모습은 한층 더 생동감 있고 생생하였다.


서한 중기 이후 토기 인형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조소 기법이 더욱 대담하고 자유로워지면서 과거 인물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던
기법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개괄적인 형태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또한 표현 대상과 소재에 있어서도 과거보다 더욱 광범위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인간의 세속적 생활과 오락생활을 중심적으로 표현하였다.
1969년 제남 북쪽 교외 지역 서한 무덤에서 출토된 채색된 가무잡기 토기 인형을 보면 그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모형 틀을 이용하여 주물을 뜬 후 먼저 흰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다시 붉은색, 검은색, 갈색, 녹색 등으로 채색하였다.
모든 토기 인형은 길이 67cm, 폭 47.5cm 의 장방형 받침 위에 놓여 있다.
중간에는 춤과 잡기를 선보이는 남녀 연기자가 있다.
노래를 부르고 춤 추는 여자가 2명 있고 물구나무 서고 공중제비를 도는 남자가 4명 있다.
전체 장면에서 관중, 악대, 연기자는 공간적으로 매우 질서 정연하고 가지런하게 배치되어 있다. 인물들의 주객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한 귀족의 연회 장면이 생동적으로 눈 앞에 펼쳐진다.
소재로 볼 때, 이 토기 인형은 춤과 노래, 잡기로 하인의 노동을 대신 표현함으로서 당시 귀족 계층의
향락적 생활 방식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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