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의 오채자기는 공예 기술, 조형 방식, 회화 기법 등에서 혁신을 이루었으며 표현주제도 매우 풍부했다.

강희제는 유교를 숭상하고 덕치를 강조했으며 백성에 대한 포용을 중시하였다. 이는 중국의 전통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소위 ‘교화를 이루고, 인륜을 돕는다’는 예술의 기능이 이 시기의 도자기에서 비교적 뚜렷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군주에 대한 충심을 표현한 『삼국연의』,『수호전』,『악비전』,『소군출색』과 같은 전쟁 이야기, 즉 민간에서 이야기하는 ‘도마인’은 종종 오채자기에 큰 그림으로 장식되었는데, 웅장한 기개, 섬세하고 과장되게 그려진 동작이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당시 서양화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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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문인 학자의 생활과 취미를 반영한 그림도 있었다. ‘희지애아’, 벼루를 좋아했던 소등파의 모습을 그린 ‘동파애연’, 도연명과 국화를 그린 ‘연명애국’, 주무숙의 연꽃을 예찬한 소설『애련설』에서 유래한 ‘무숙애련’, ‘죽림칠현’, ‘세한삼우’, ‘추성부도’, ‘미불배석’ 등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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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산을 상징하는 ‘류개백자’의 석류 도안이 있다. 다산, 다복, 장수를 석류, 불수감나무, 복숭아 등을 조합한 도안을 통해 표현했으며, 자식이 훗날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망자성룡’, 득남을 축하할 때 쓰이는 ‘기린송자’, 자손이 집에 가득하다는 의미의 ‘자손만당’등 복을 비는 도안들도 있었다. 국영 도요지의 경우, 농업과 양잠업 및 경작을 장려하는 ‘경직도’를 최고로 쳤다.
강희 30년(1691)이후, 과거 시험이 진행되고 한족 문화를 중용하면서 도자기에도 시구나 그을 쓰기 시작해서 ‘장원과가’, ‘독점오두’, ‘동파제시’ 등의 글이 적힌 그림이 등장했으며 그 서법과 글의 배치에도 신중을 기했다. 이렇게 글귀를 소재로 삼은 도자기는 훗날 청대 도자기 장식의 전형적인 특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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