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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소식

[여주마을 구석구석 93] 소헌왕후 마을 세종대왕면 광대리

죽포미술관 2022. 5. 2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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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2022. 05. 1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광대리의 유래

광대리는 본래 여주군 수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석동과 대정동을 합하여 광대리라 했으며 행정리는 광대 1, 2리로 나뉘어져 있다. 자연마을은 한우물, 서낭뎅이, 광석동이 있다. 한우물은 대정동 나분들 서쪽에 있는 마을로 과거 큰 우물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마을로 현재 광대1리를 가리킨다. 서낭뎅이는 서낭이라는 수령을 알 수 없는 나무가 광석동 마을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광석동은 광대2리를 가리키며, 광대리에서 가장 으뜸 되는 들이 있다.

 

소헌왕후 마을

광대2리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소헌왕후 마을로 재탄생하고 있다. 지역역량강화사업 출발 당시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인 회룡고조형(回龍古祖形)터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소헌왕후 마을’로 스토리텔링을 하였다. 지관들의 말에 따르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는 영릉도 회룡고조형 명당에 속한다고 한다. 속리산에서 뻗어 나오는 백두대간이 월악산 문수봉과 이천 노성산을 지나 광대리 장구봉을 만들고 다시 북성산을 지나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는 왕대리에 다다른다. 그리고 산맥은 다시 머리를 돌려 지나온 북성산과 광대리를 바라보니 형국이 누워있는 용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회룡고조형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 할아버지 명당이고 광대리는 그 다음 명당이라는 것이다. 광대2리 광석동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계시는 왕대리에서 맥이 내려와 서낭당고개를 넘어 마을을 휘감고 다시 장구봉을 돌아보니 광대리는 영릉 다음으로 명당이 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광석동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8남 영응대군의 후손들이 광대리에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오늘날 광대2리 주민들은 광대리를 소헌왕후의 마을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 광대2리 서낭고개. © 세종신문

영응대군 후손 전주이씨 집성촌

영응대군 염(琰)은 소헌왕후가 낳은 세종의 8남이다. 여주의 전주 이씨는 광평대군파, 영응대군파, 덕천군파, 수도군파, 담양군파 등 여러 파로 존재한다. 『조선의 성』에 나온 자료를 참고하면 전주 이씨는 능서면 광대리에 18호가 산다고 되어 있다. 영응대군의 4세 몽윤 때 능서면 광대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서낭고개

자연마을 사낭뎅이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큰 서낭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서낭뎅이 마을에는 서낭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는 서낭나무는 세월이 흘러 자취를 잃어버렸다.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큰 서낭나무가 있었는데 길을 내면서 베어냈다고 한다. 서낭나무를 베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교회 목사가 나무를 베었다고 한다. 오늘날 광대2리에서 오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오래된 엄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광대2리 주민들은 그 엄나무를 마을의 서낭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 넓은들 팜스테이마을. © 세종신문

넓은들 마을

넓은들 마을은 여주시의 문화관광자원과 청정 지역의 자연을 느끼도록 조성된 녹색농촌체험마을이다. 광대리는 대왕님표 여주쌀과 밤고구마, 여주배, 블루베리를 비롯한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으며 전원 마을로 수도권 도시민의 쉼터 및 직거래 장터를 형성하여 자연과 전통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광대리에 만들어진 넓은들 마을은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농촌체험마을 중 한 곳이다. 여주는 예로부터 풍년의 고장으로 불렸다. 1년 내내 가뭄도 홍수도 크게 농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지형을 지녔기 때문이다. 넓은들 마을은 광대리에서 생산된 쌀을 가지고 백설기 떡케이크 만들기를 하고 고구마 묵 만들기 체험도 한다. 이외에도 넓은들 마을은 느타리버섯 따기, 인절미 만들기, 압화, 김치 만들기 등의 상시 체험과 계절별 농촌체험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人터뷰] 이두표(78) 선생

고향이 광대리인가?

고구마 때문에 2010년경에 광대리로 들어갔다. 강천면 도전리에서 살다가 도전리는 산골이라 고구마 농사를 지을 곳이 없어서 광대리로 들어갔다. 나는 1945년에 만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만주에 계셨는데 우리 어머니가 만주까지 쫓아가 내가 태어나고 해방이 되어 어머니가 나를 안고 왔다. 내가 들은 얘기로는 밤에 몰래 중국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오는데 내가 그렇게 많이 울더라고 했다. 그래서 들키면 안 되니까 같이 배를 탄 사람들이 ‘애 때문에 여러 사람 죽인다’고 바다에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주저 하는데 내가 계속 울어서 바다에 버리려고 거꾸로 드니까 울음 뚝 거쳐 겨우 안고 왔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나?

그건 잘 모른다. 어머니와 내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 들어오고 얼마 후에 6.25전쟁이 터졌다. 우리 아버지가 3형제인데 전쟁 때 아버지와 아버지 바로 밑 동생이 국군으로 갔다. 우리 아버지가 마을 청년단장이라 군대를 안가도 되는데 바로 밑에 동생이 전쟁터에 끌려가는데 나 혼자 집에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자진해서 같이 군대를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나가서는 그것으로 끝이다. 두 분 다 전사했다.

 

▲ 이두표 선생. © 세종신문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있나?

그 시절은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다. 전쟁 날 때 갓난쟁이 동생이 한명 있었는데 그 동생도 피난 갔다가 돌아오면서 홍역에 걸려 죽었다. 전쟁이 나고 아버지 찾아내라고 어머니 가슴에 총을 들이대고 협박을 하고 그랬다. 그리고 피난 갔다 오다 동생 잃고 그 후에 아버지 전사했다는 소식 듣고 하다 보니 우리 어머니는 홧병이 들어 가슴 중턱이 내려앉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내가 군대 갔다 오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피난 갈 때는 막내삼촌 등에 업혀 장호원까지 피난을 갔다 왔다. 막내삼촌 아들이 나보다 세 살이 위라는 그 형은 걸어가고 나는 안 간다고 떼를 쓰니까 막내삼촌이 업고 갔다. 갓난쟁이 동생은 엄마가 업고 갔는데 오다가 묻었다.

 

학창시절 기억도 있을 것 같은데?

초등학교는 도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도전초등학교 9회 졸업생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전체 학생수가 120여명 되었다. 도전초등학교는 강원도와 경계라 가까운 반계리 아이들도 왔다. 중학교는 걸어서 여주중학교를 다녔다. 예전에는 말감산으로 넘어 다녔다. 처음에는 문막중학교에 입학해 걸어 다니다 몇 달 후 여주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문막중학교까지 걸어 다니려면 별보고 나가서 별보며 돌아왔다, 마을에 중학을 다니는 친구들도 없어서 혼자 걸어 다니다 보니 위험하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여주중학교로 전학을 시켜줬다. 여주읍에서 하숙을 쳤다. 그 당시 하숙비가 한 달에 쌀 반가마정도 되었다 주말마다 집에 오는데 집에 왔다가 하숙집으로 돌아갈 때 쌀 한말을 지고 가야했다.

 

결혼은 언제 했나?

우리 할아버지 연세가 80대다 보니 내가 결혼을 일찍 했다. 군대 가기 전이니까 스무 살 되었을 때였다. 강제결혼을 했다. 결혼 안한다고 했다가 할아버지께 몽둥이로 맞았다. 그러니까 몽둥이 맞아가며 결혼을 한 거다. 그 시절만 해도 양반 쌍놈 따질 때라 우리 집사람은 양평 지제면에 사는 파평 윤씨 양반집 딸이다. 얼굴도 못보고 어른들이 다 정해 놓고 양동에서 약혼사진 찍을 때 얼굴을 처음 봤다. 양동에서 구둔역까지 한 정거장이다. 나는 여기 도전리에서 양동까지 걸어갔다. 사진만 찍고 밥도 못 먹고 기차시간이 있어서 바로 갔다. 여기 말감산에 공군부대가 있어서 자주 올라가 놀았다. 여름에 사진 찍고 가을일 끝내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양평군 지제면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공군부대에서 트럭을 한 대 내 줘서 그걸 타고 갔다. 우리 집에서는 웃손으로 할아버지가 직접 갔다. 공군 군인들이 한 20여명 들러리로 갔다. 나는 결혼하기 싫어서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밥도 안 먹고 군인친구들에게 “야! 가자” 그랬다. 그랬더니 신부 집에서 짐도 실고 그래야 하는데 그 신부를 안 데리고 갈까봐 짐이고 뭐고 신부부터 트럭에 태웠다. 그래서 장롱 같은 짐들은 나중에 다시 실어왔다 그렇게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몇 달 있다가 바로 군대를 갔다. 집사람 뱃속에 첫애가 들어 있을 때 군대를 갔는데 제대 하고 오니까 둘째도 태어나 있었다.

▲ 광대리 고구마 밭. © 세종신문

여주에서 주로 어떤 일을 했나?

젊어서는 사업한다고 돌아치며 논도 많이 팔아먹었다. 정동성, 이규택 국회의원과 같이 정치활동도 좀 했는데 그건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역 정치라는 게 맨 남들 뒤치다꺼리만 하는 그런 거였다. 마흔이 넘어 직장생활도 좀 하다가 결국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점봉동, 광대리 이런 곳에서 땅을 얻어 많이 할 때는 6만평 넘게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그 시절에는 고구마가 꽤 괜찮았다.

 

광대리에는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나?

광대리로 고구마농사 지으러 들어간 지가 13년 되었다. 고구마 창고가 있어서 그 창고를 얻어서 광대리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광대리 창고만 사용하려고 했는데 창고가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손을 탈 수가 있어서 창고 옆에 집을 짓고 살림을 시작했다. 광대리에서 고구마를 제일 많이 재배할 때는 5~6만평 된다. 지금은 고구마 농사가 인건비 때문에 타산이 맞지 않는다. 농촌실정이라는 것이 전부 농협에 빚을 얻어 농사를 짓고 있어서 전부 농협 거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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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sejongnewspaper.com/sub_read.html?uid=31608§ion=sc157§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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